구십에 가까운 김용 선생이 '천룡팔부'의 결말을 고쳤는데, 옛 판본에서 왕어언은 단예를 따라 대리로 돌아왔고, 모용복의 곁에는 아벽이 있었다. 그러나 새 버전에서는 모용복의 곁에 아벽 외에 왕어언(王語嫣)이 있고, 단예는 목완청(木婉淸)과 종령을 왕비로 맞이했다. 새로운 결말에서 왕어언은 단예를 떠나 모용복을 선택한다. 왜일까?



많은 독자들이 모용복에게 왕어언의 귀환이야말로 소설이 있어야 할 결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더 현실적이고 소설의 전체 구조에 부합하기 때문이라면 왜 왕어언은 실제와 다르게 모용복을 떠나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단예가 왕어언이 아니라 신선누나의 초상을 보고, 즉 왕어언의 외할머니를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예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모용복에게 돌아 갔다고 생각한다. 모용복은 애초에 그렇게 왕어언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왕어언은 왜 그를 돌보려고 갔는가? 


신선 누나의 중요한 요소 말고도 왕어언이 떠난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는데, 바로 단예의 곁에는 목완청, 종령이 있기 때문이다. 왕어언은 처음에는 단예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목완청, 종령과는 달리, 단예와의 감정은 사랑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록 목완청하고 종령이 있더라도,  왕어언의 위상은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왕어언은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초상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왕어언은 그녀가 목완청, 종령과 다를 바 없다고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칭찬 일색인 '여동생'으로, 세 사람의 지위는 평등한 것이며, 왕어언은 자신의 특별함을 느끼지 못한다. 왕어언 성격으로 어떻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놔두고 남을 사랑하겠는가,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단예 곁에 있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모용복 곁으로 돌아오면 모용복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어서, 모용복의 곁에서 사랑 받으며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옛 과거를 떠올려 본들 그 때는 그들의 감정이 순수하고 아무런 이득이 없는 단순한 감정이라 기분이 좋았겠지만 왕어언은 모용복을 데리고 대리에 와, 보살핌을 받고 싶을 뿐만 아니라, 단예에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으면 왕어언이 단예를 볼 때 자신도 모르게 두 걸음씩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여자에게 감정이란 불순물이 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있다면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